이화여대 총장 김활란의 친일파 행적과 학생들에게 정신대 참여를 독려한 내용, 광복 후 운영한 낙랑클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에 앞장서 여성들과 자신의 이대 학생들에게 정신대 참여, 해방 후에는 낙랑클럽이라는 사교단체를 운영했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논쟁 개요
최근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친일파 김활란에 대해 논쟁이 뜨겁습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7대 교장이자 최초의 한국인 총장이지만, 동시에 여성들을 정신대로 유도했을정도로 악질적인 친일파이기도 하면서, 해방 후에는 일류 여대를 졸업한 여대생 출신을 호스티스로 한 '낙랑 클럽'이라는 고급 사교단체를 조직해 위문단을 조직했고, 실제로는 미군 로비를 이한 매춘 단체라는 의혹이 여전한 만큼 팩트체크를 해보겠습니다.
출생 성장
김활란은 1899년 2월 27일 인천에서 태어났고 어릴적 이름은 '김기득(金己得)'이었습니다.
7세 때 가족 전체가 세례를 받았고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학교에 입학하며 세례명을 한자식으로 고쳐 '활란'이라고 해 이름이 '김활란'이 되었습니다.
1918년 3월 이화학당을 졸업 후,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오하이오(Ohio)주의 웨슬리안대학(Wesleyan University)에서 1924년까지 공부하여 학부 과정을 마쳤으며, 1924~1925년까지 보스턴대학(Boston University)에서 종교철학 석사과정에 수학한 우리나라 최초의 1호 박사입니다.
김활란 친일 행적
1922년 그시대 미국까지 가서 고등교육을 받고 외교운동을 하였지만, 중일전쟁을 전후해 일본에 협력하며 적극적인 친일파 행적을 보였습니다.
1936년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는데 '아마기 카츠란'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것은 물론이고 1936년 말부터 갑자기 교육과 여성 계몽 분야에서 친일 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총독부 관제 단체에는 거의 다 참석했고 매일신보에 정신대 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글을 수백 편 쓰는가 하면 내선일체 찬양글도 많이 썼으니 김활란의 변절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시 김활란과 함께 친일반민족행위에 앞장섰던 여성계 지도자들이 박마리아, 모윤숙, 노천명 등입니다.
매일신보에 정신대 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글을 수백 편 쓰는가 하면, 더 충격적인 사실은 자신이 졸업한 이화여자전문학교(졸업 당시에는 이화학당 대학부) 학생들에게도 정신대 참여를 독려한 것입니다.
김활란이 매일신보에 쓴 글을 보겠습니다.
매일신보 정신대 참여 독려 글
제목 :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중략)...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 특별 연성소 지도원 양성 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 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김활란,「매일신보」(1943.12.25)
광복 후 활동
광복후에는 친일파 숙청이 제대로 되지 않으며 이화여전의 교장이 되었습니다. 타고난 활동가답게 적극적이었던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아무런 언급 없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 점도 뻔뻔합니다.
이승만의 지시하에 모윤숙이 주도하여 1951년에 설립한 '낙랑클럽'의 총재를 맡은 적이 있고, 이화여전 졸업생들을 모아 위문단을 조직하여 부산 인근에 주둔한 군부대를 찾아다니며 위문활동을 했습니다.
문제는 이 낙랑 클럽이 겉으로는 이화여대 출신으로 구성된 고급 외국인 대상 사교클럽인데, 실제로는 미군 로비를 위한 매춘 단체라는 의혹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김활란의 친일행적과 여성들의 정신대 참여 독려를 보면 놀랍지도 않은 행적이죠. 친일행적에 낙랑클럽 운영까지 동상이 아직도 있는게 의아합니다.
낙랑클럽 이란?
김활란은 해방 이후 정국에서 모윤숙과 함께 '낙랑 클럽'이라는 고급 사교단체를 조직합니다. 낙랑 클럽의 자세한 실체는 90년대 중반 중앙일보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가 비밀해제한 문서에서 발견하여 폭로하면서 널리 알려졌는데, 당시 국내 주둔하던 미군의 정보기관인 CIC가 작성한 비밀 문서에 기록된 이 단체의 실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밀문서
낙랑클럽은 서울에 거주하는 여성들에 의해 48년이나 49년께 사회단체로 조직됐다. 이 단체의 목적은 외국귀빈, 한국정부 고위관리 및 미군장성, 주한 외교사절 등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다. 이 단체의 회원은 한국의 모 일류 여대를 졸업한 교육받은 여성들에 주로 국한됐다. 이들은 대개 영어를 할 줄 아는 매력적인 여성들로 교양있는 호스티스였다. 특히 부산 피난 시절에는 송도(松島) 돌산 위에 세워진「시 사이드 맨션」등이 파티장으로 이용됐다. 이 클럽을 앞장서 조직하고 이끌고 있는 사람은 YWCA 총재이자 저명한 시인이다. 그녀는 51년12월 유엔총회 당시 소련 외무장관 비신스키를 열렬히 포옹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낙랑클럽 회원들은 기혼, 미혼, 무직, 직업 여성등 다양한 인적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초기에는 회원수가 1백 50명에 달했다. 외국인 접대행위는 몇몇의 경우 외국인의 정부(情婦)가 되는 일로 발전되기도 했다. 실례로 낙랑클럽 조직 구성에 참여했던 한 여성은 부산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영관급 장교의 정부(情婦) 노릇을 했다. 나무위키 참조
김활란 가족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자녀는 없고 1970년 2월 10일 뇌출혈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유언으로 “인간의 생명이란 불멸하여 육체가 없어지더라도 죽은 사람이 아니므로 장례식 대신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해 주는 환송 예배를 해주기 바란다.”는 이원론적이고 영혼 불멸적인 사상이 담긴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화여대 학생들도 그녀의 이러한 친일 반민족 행위를 알기에 교내에 있는 동상 철거를 요구하는 쪽지를 붙이는 플래시몹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연합뉴스 관련기사는 아래 링크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약 정리
오늘은 친일파이자 반민족행위자라는 평가가 지배적인 이화여대 총장이었던 김활란의 행적과 그녀가 운영했던 낙랑클럽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창씨개명은 물론이고 일본이 벌인 전쟁에 적극 협력하며 여성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무엇보다 여성들을 정신대로 유도했을 정도로 악질적인 친일파행동은 한탄스럽습니다.
친일파 숙청이 제대로 되지 않아 광복 후 어떠한 반성과 처벌도 없이 주류에 편승해 낙랑클럽으로 여성의 인권을 다시 한번 떨어트린 김활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와 늦었지만 친일파의 제대로된 청산이 반드시 필요한 시기입니다.
오늘 정리해 드린 내용으로 김활란에 대해 궁금했던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우리 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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